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릴 아이누 (문단 편집) == 역사 == 이들은 홋카이도와 사할린 아이누에 비하면 형성된 시기가 늦은 편으로 15세기 이후에야 형성된 집단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아이누 도래 이전에 살던 [[말갈|오호츠크계 말갈인]]을 정복 및 동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쿠릴 아이누들이 산출하는 [[해달]] 가죽은 다른 지역에선 얻을 수가 없는 희귀품이었다 하며 옛부터 교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이들은 17세기까지도 일본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도 시대]] 중기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존재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던 [[아이누|홋카이도 아이누]]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들의 존재는 [[1695년]] [[러시아]]의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를 기점으로 남하한 원정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같은 시기에 캄차카 서해안 지역에서 표류한 [[일본인]]을 발견했는데, 이때 처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1700년]]에 [[카자크]] 부대가 쿠릴 열도를 처음 남하해 지금의 홋카이도 부근까지 도달했고, [[1711년]]~[[1713년]] 사이에 일본인과 동행하여 쿠릴 열도를 탐험하면서 "쿠릴 열도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 지도 안에는 이투루프, 우루프, 쿠나시르, 홋카이도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1713년]]에 북쿠릴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1725년]] [[카자크]] 부대의 코즈이레프스키는 [[러시아 제국|중앙 정부]]에 보내는 캄차카 및 쿠릴 열도 조사서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투루프와 우루프, 쿠나시르에는 아이누가 살고 있으며, 이투루프와 우루프 지역의 아이누들은 자유민들이며, 쿠나시르의 아이누들은 마쓰마에와 교역하고 있지만, 마쓰마에의 신민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조사에 의거하여 [[1726년]]에 15도를 표시한 "캄차카 반도 해도"가 작성되었다. 여기서 15도란 시무시르 섬으로 북변 4도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섬들을 의미한다.] >---- >- 1725년 카자크 부대의 코즈이레프스키 그 후 러시아 탐험대[* 이중에 [[덴마크인]] 1명(시판베르크)과 [[영국인]] 1명(올튼)도 포함되어 있었다.]가 [[1737년]] [[6월]]부터 3차에 걸쳐서 쿠릴 열도를 조사[* 당시 러시아측은 아이누 모시르를 [[무주지]]로 간주하였고, 영유권 흭득의 의사를 가지고 탐험대를 파견한 것이다.]했는데, 이때 중앙에다가 이렇게 보고를 보내었다. >[[에도 막부|에퐁(일본)]]의 지배 하에 있는 곳은 [[홋카이도|마쓰마에도]]뿐이며, 그 이외의 섬들은 지배당하지 않았다. >만약 명령만 내리면 (중략) 북위 43도부터 46도까지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을 여제의 신하로 삼을 수 있고[*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 시코탄, 하보마이 및 홋카이도 북부를 의미하며 이중에 우루프와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들이 현재 [[쿠릴 열도 분쟁]]의 핵심이다. 홋카이도 북부가 포함된 이유는 오류일 수도 있지만 홋카이도 내 일본의 영향력은 알고 있었음에도 부동항에 목말라 있던 러시아가 마츠마에의 영지와 거리가 좀 멀어 비교적 일본의 영향력이 느슨한 홋카이도 북부까지도 욕심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홋카이도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은 훗날 2차 대전 당시 스탈린이 홋카이도를 반분한 요구까지 이어진다.], 46도부터 마지막 섬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당장이라도 편입할 수 있다. >---- >- 당시 러시아 탐험대의 보고에서 [[1760년]]경 러시아는 [[사할린]]과 [[연해주]], 우루프, 이투루프, 하보마이, 앗케시, [[소야]], [[루모이시|루모이]] 주변까지 접근해 아이누족들을 살해하면서 [[식민지]]를 선언하였고[* 다만 식민지 선언은 러시아 중앙 정부의 뜻이 아닌 카자크인들이 단독으로 선언한 거라 정식적인 영토 편입 조치라 보긴 힘들다. 사실 이 무렵에는 이미 홋카이도의 전 영역이 사실상 일본의 영역권에 복속된 상태였다.], [[1765년]]에는 우루프 섬을 완전히 정복했다.[* 하지만 아이누족들은 이를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때 사룬구루 지역에서 1,000명의 아이누들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러시아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1766~1767년 사이에 [[카자크]]들이 우루프, 이투루프, 하보마이, 홋카이도의 앗케시까지 들어가 다른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했던 것처럼 [[세금|야삭(ясак; 모피, 가축 등의 현물세)을 부과]]하고, [[강제노동|강제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1769년]] [[9월]]에 카자크가 철수하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아이누족들은 그 틈을 타 [[러시아인]]들을 살해하는 등 반감을 보이기도 했다.] [[1771년]][* 또는 [[1772년]].] 우루프 섬에서 [[러시아인]]들과 이투루프 섬에서 온 [[아이누]]들이 충돌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인들의 [[쿠릴 열도]] 이주는 한층 강화되고, 쿠릴 아이누들에게 러시아 국적이 강제되었으며, 자유로운 모피 채취를 방해당하면서 야삭을 부과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1772년]] [[12월]] [[이르쿠츠크]]의 [[시베리아]] [[총독]]은 캄차카 [[사령관]]에게 앗케시에서 홋카이도에 들어가 [[일본인]]과 교역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캄차카 사령관은 쿠나시르의 아이누족들과 관계를 맺고,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를 하보마이, 시코탄, 앗케시에 보내어 일본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일본 내 사정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1776년]] [[이르쿠츠크]]의 상인 샤바린이 우루프 섬의 아이누들과 화해했고, 이투루프와 쿠나시르에 들어가 아이누들에게 야삭을 부과했다. 이때 시베리아 총독은 중앙정부에다 이르쿠츠크의 상인이 1,500명의 아이누족들을 러시아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고했다. [[1779년]] [[4월]] [[예카테리나 2세]]는 쿠릴 아이누족들을 야삭에서 해방시키고, 자유권을 부여하도록 명하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시베리아의 총독은 시코탄을 포함한 우루프, 이투루프, 쿠나시르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 조치한 것으로 인식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영토 복속과 아이누의 편입보다 일본과의 교역에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다소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이 해당 지역에 대해 본격적으로 영토화 의지를 굳힌 건 1785년이다. 이때 러시아 제실 과학 아카데미는 "역사 지리 캘린더"를 발행해 "쿠릴 열도는 쿠릴의 로바트카라 불리는 캄차츠카 [[곶]]에서 일렬로 남서로 나열된 일본 마쓰마에도까지의 태평양 섬을 말한다"란 내용을 기재해 우루프, 이투루프, 쿠나시르, 시코탄, 하보마이를 러시아령으로 지정했다. [[1787년]] 러시아 제국은 상업참의회 장관인 보론쵸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러시아 해군을 담당하고 있는 무로프츠키 해군대좌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지령했다. * 일본에서 캄차츠키의 로바트카에 이르는 모든 크고 작은 [[쿠릴 열도]]를 주항하여 지도에 기술할 것. * 마쓰마에에서 로바트카에 이르는 모든 섬을 러시아의 소령(所領)으로 편입할 것. * 최남단의 쿠릴 열도와 마쓰마에도(홋카이도)의 정확한 위치를 규정하고 그 상태를 기술할 것. * [[아무르 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을 주항하여 그 [[연안]], 하구, [[만(지리)|만]]을 기술할 것. 러시아의 이러한 태도 변화의 원인은 [[그레이트 게임|무주지 탐험을 위해 북태평양으로 진출한 [[대영 제국]]의 쿡 함장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항해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쿠릴 아이누들은 러일 양국의 영유권 분쟁에 적극적인 대항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양국에 분리 편입되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하에 자극받은 일본의 [[에조]] 경영이 강화되고 일본과 러시아 간의 쿠릴 방면 국경 분쟁이 있었으나 1855년 시모다 조약과 뒤이은 1875년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D%8A%B8%ED%8E%98%ED%85%8C%EB%A5%B4%EB%B6%80%EB%A5%B4%ED%81%AC_%EC%A1%B0%EC%95%BD_(1875%EB%85%84)|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쿠릴 지역 아이누들은 3년 이내로 일본과 러시아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했고 대부분은 일본 국적을 택하였다. [[1884년]]에 일본은 국방을 이유로 쿠릴 북부 아이누 97명을 시코탄 섬으로 이주시켜 [[농업]]과 [[목축]]에 종사시켰으나 익숙치 않은 생활 및 풍토로 인하여 [[인구]]는 격감했다. 이후 1898년에 이들을 군함에 태우고 북쪽 쿠릴 지역으로 재이주시켜 전통 [[어업]]에 종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945년]]에 소련이 쿠릴 열도를 점령하면서 일본 국적의 아이누들은 일본 본토로 강제 이주당했고, 이로써 쿠릴 아이누 문화는 러시아령이 된 쿠릴 열도에서 완전히 끊겼으며 남하한 이들은 동계인 홋카이도 아이누의 정체성에 동화되었다. [[요코하마국립대학]] 명예 교수이자 [[아이누어]] 연구자인 무라사키 쿄코(村崎 恭子, 1937 ~)가 과거 1962년에 홋카이도에 생존 중이던 4명[* 2명은 부부, 나머지 둘은 고령의 여성.]을 찾아내 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부부 관계인 2명은 완전히 일본에 동화된지라 쿠릴 아이누 방언을 구사하지 못하였으며, 나머지 둘은 홋카이도 이주 이후, 남편에 의한 학대 등으로 힘든 생활을 보낸 탓에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현재 쿠릴 아이누의 정체성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